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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ievers

김예슬 : 고대 자퇴녀




Q: 조용히 그만둘 수도 있었는데 대자보를 붙이고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이유는?

A: 너무나 약해서였다. 다시 비겁해질까봐, 다시 받아달라고 학교 문을 들어설까봐. 내 안의 비겁함과 싸우기 위해 그렇게 했다. 거대한 사회적 모순은 은폐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인 양 떠넘겨지는 세상이다. 그래서 무력한 개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고통이 깊어가고 있으니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 김예슬과의 인터뷰, <경향신문>



두어달 전, 세간을 시끄럽게 한 뜨거운 감자가 있었는데, 인터넷에서는 그녀의 실명보다 '고대 자퇴녀'로 더 알려진 한 여대생의 1인 시위가 그것이었다. 고려대 경영학과, 소위 명문대 학생이 야기한 일이라 사회적 관심이 지대했을거라 짐작된다. 냉소적인, 더러는 그녀를 비겁자라 조소를 던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수 많은 젊은이들이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했으며,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분위기가 무르익던 와중,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반전이 생기는데, 김예슬은 자퇴 시위 후 뒤로 몰래 복학 의사를 고대측과 조용히 알아보고 있었고, 그 모든것이 처음부터 운동권 학생이로서의 인지도 상승을 노리는 숨은 저의가 있었다 주장하는 동문들이 등장하면서 파장이 더욱 커졌다.

그녀의 운동권 개입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 없지만 혹시라도 복학의 진위 여부가 사실이었다면, 네티즌들의 말처럼 그녀의 진정성이 도마위에 올라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지지자들마저 배신감에 울분을 토하며 그녀의 '쇼'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그녀를 옹호하는 몇몇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이제는 들리지도 않는다.

그런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그녀를 나는 고심끝에 믿어주기로 했다. 당당하게 실명을 밝힌 저런 대자보를 걸었는데, 차후 행보를 살피는 시선들과 얼음판 같이 싸늘한 인터넷 여론를 예상치 못했을거라 생각지 않는다. 설령 반쪽짜리 진심이었다 치더라도, 저런 쇼를 감행하기에는 비범한 용기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자질을 묻기 전에, 그녀의 메세지를 더 주목하고 싶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볼 일이다."

달걀로 바위를 치겠다는 이가 여기 있다. 나 하나 없어도 세상 돌아가는 것이야 그대로인데,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알면서도, 허공에다 두 주먹을 휘둘러 보는 심정은 어떨까. 공장에서 빵 구워내듯 오로지 경쟁과 내 상품 가치에만 목숨 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학을 고민하는 자들이 비웃음을 당하는 세상에 대해, 그녀는 처절하게 누군가가 책임져줄 것을 부르짓는다. 무사상, 몰개성, 그리고 획일화된 피라미드 자본주의의 생태는 과연 누구의 탓인가. 과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새내기 인생들의 탓인가. 식탁에 올라오는 쇠고기 운명임을, 끌려가는 송아지는 결국 너무 늦게서야 깨닫게 되는것과 무엇이 다른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겠노라 연일 최루탄 맞으면서 이기지도 못하는 싸움을 매일 해대던 내 어릴적 그 대학생들을, 나역시 한때는 집단 패배 의식에 젖은 한심한 자들이라고 싸잡아 도매급으로 취급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평화로운 오늘날 화염병 없어진 대학가에서는 과연 무슨 대의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모르겠다. 두 얼굴이라 욕먹는 자퇴녀의 저런 이중적인 고뇌조차, 한번쯤 진지하게 시름해보는 젊은이들을 나는 무척 오래동안이나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정작 위선자는 누구인가. 진정 누가 패배자인가.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돌로 먼저 치라.'

그녀는 먼 훗날 그래도 변하지 않는 세상을 한탄하며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날이 올 줄도 모른다. 세상 물정 모르고 젊은 객기를 부렸나, 그냥 남들 따라 물 흐르듯 둥글게 둥글게 살면 편했을 것을, 스스로에게 야속한 변명을 찾을 날이 올 줄도 모른다. 그래도 단 한 순간만큼은 자신에게는 솔직했고, 누가 뭐래도 부끄럽지 않게 언과 행이 함께 따랐다면, 아무도 그녀를 더이상 기억지 않아도, 설령 그 비정한 댓가가 젊음 그 전체가 되었다 하더라도, 굳이 의미없는 일이라 절망할 필요는 없을지 싶다.

올바른 생각은 반드시 세상을 바꾼다. 설령 그것이 더이상 내가 없는 후손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세상은 큰 무리가 아닌 몇몇 영웅에 의해 뒤바꿨음을, 역사는 수 없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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