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etween Books

무소유 : 법정 스님




2월 15일

설을 쇠고 스님을 뵈러 상경하는 길, 차 뒷좌석 매화가지 한아름이 4년 전 그날로 인도했다. 스님이 섬진강으로 오라 했다. 정갈하고 소박한 방에서 스님은 매화를 띄워 차를 우려주셨다. 깊고 맑은 향기에 온 정신이 취해 그만 꽃마저 마셔버렸다. 스님이 "뱃속에 꽃폈다"고 웃었다. 한참을 따라 웃었다. 생사가 여일한 모습으로 바위와 바람과 별과 이야기하시고 눈길을 나누시던 스님의 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났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오직 순수한 생명 그 자체일 수 있도록 스님은 바라보고 대화하고 사랑하셨다.

병원의 공기는 탁했다. 서울이라는 곳은 숨막히는 듯한 시간과 사람과 일들이 오갔다. 스님의 창가에 매화 화병을 작게 만들었다. 아주 작은 딱 한가지로. 좋았다. 아직 피지 않은 매화 봉우리가 더 보기 좋았다. 스님은 의식이 없으셨다. 다리를 주무르니 깨셨다. "아버님은 잘 뵙고 왔냐?" "차례 잘 지냈냐?" 겨우 두 마디에 힘이 들어 눈을 감으셨다. 눈물이 났다. 스님의 발에 얼굴을 비비고 한참 스님의 숨결을 느꼈다. 저 숨결을 언제까지 붙들 수 있으려나. 그토록 "자연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셨던 스님의 마지막 설법은 대자연의 경이 그 자체로 남아 있었으면 했다. 스님의 마지막 숨결이 병원이 아니라 강원도 산골의 오두막이었으면 좋으련만.

- 박상원(베이비네임스 대표)의 '법정 스님 간병 일기' 中


지난 주 그가 세수 78세로 입적하였다 접한 후, 막연하게 무슨 죽음의 높임말쯤 되는 불교 용어려니 찾아보았다.

입적(入寂) 혹은 들입, 고요적: 적멸(寂滅)에 들다, 고요한 세계로 들다의 뜻으로 고승들의 죽음을 표현. 열반(涅槃), 원적(圓寂), 입멸(入滅)등의 용어와 함께 죽음을 의미하나 원래는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용어.번뇌의 불길이 꺼지고 고통이 소멸된 상태로서, 죽음을 이러한 최고의 경지에 비견하는 것. 육체의 제약이란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라도 신체의 병들고 늙어감을 피할수는 없으며 어쩔수 없이 현실적인 구속과 제약을 받게 마련이기에 죽음으로서 육체를 벗어 버리면 완벽한 열반을 구현할수 있는바, 이것을 아무런 제약이 없는 열반이란 뜻에서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도 일컬음.


사람들의 우둔함이란 한결같다. 고인이 눈을 감은 그제서야 뒤늦게 그가 펴내었던 서적들이 전부 동이 나도록 팔려나간다. 행여나 사재기를 하여 웃돈에 되파는 우인들이라도 없다면 그걸로 다행일 것이다. 아러니리하지 않은가. 평생 '무소유'를 외치던 분의 남은 책들을 저마다 '소유'하려는 집단적 무리들이. 진작에 고인의 책 두어점은 가지고 있었으나, 사람 마음이란게 늘 없는 것에만 유독 집착하니, 와이프 역시 그 어리석은 bandwagon에 동참하여 애굳은 나를 한인 서점으로 재촉하여 보내었다. 역시나, 없다. 한권도, 없다. 한국에 없다고 미국에 남았을까.

그리고는 그날 고인처럼 단아하게 책장 한 귀퉁이에 앉아있던 <무소유>를 집어들었다. 무려 40여년전 쓰여진 그의 글귀들이 아직까지 싱싱하고 유려하다. 자연처럼 더함도 덜함도 없는, 정제된 깊은 생각의 샘들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요 며칠 사이에 뜰에는 초록빛  물감이 수런수런 번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 이래 자취를 감추었던 빛깔이 다시 번지고 있는 것이다. 마른 땅에서 새 움이 트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하기만 하다. 없는 듯이 자취를 거두었다가 어느새 제철을 알아보고 물감을 푸는 것이다. 대지의 조화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새봄의 흙 냄새를 맡으면 생명의 환희 같은 것이 가슴 가득 부풀어 오른다. 맨발로 밟는 밭흙의 촉감, 그것은 영원한 모성이다. 거름을 묻으려고 흙을 파다가 문득 살아 남은 자임을 의식한다. 나는 아직 묻히지 않고 살아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살아남은 자' 中 (1972)


'엄마들이 아가의 서투른 말을 이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 침묵을 배경 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 '침묵의 의미' 中 (1974)


'현대인들은 자기 행동은 없이 남의 흉내만을 내면서 살려는 데에 맹점이 있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을,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아무리 바닥이 드러난 세상이기로, 진리를 사랑하고 실현해야 할 지식인들까지 곡학아세와 비겁한 침묵으로써 처신하려 드니,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배반이다.'

- '인간과 인형' 中 (1974)


고인은 비단 무소유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화엄경>과 더불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생애 최고의 책이라 단언하는 소년같은 순수한 영혼도 엿보이고. <요한일서>를 인용하는 종교를 초월하는 포용력은 진정한 깨달음의 모습이다. 지나치게 배타적인 기독교의 입장과는 사뭇 대조된다. 그래서 수많은 크리스찬들까지 고인을 기리는 모양이다.

암튼 그가 가셨다. 공덕의 결과물인 사리나저, 속세의 허물이라 남기지 않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Between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Fall of Giants - Ken Follett  (0) 2011.10.02
The Quants : Scott Patterson  (0) 2010.05.21
The Historian : Elizabeth Kostova  (0) 2010.03.17
좋은 이별 : 김형경  (1) 2010.02.08
Blink : Malcolm Gladwell  (0) 2010.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