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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Books

좋은 이별 : 김형경




'아름다움이 언제나 유한성을 전제로 하듯이, 상실한 것은 늘 더 미화되고 이상화된다. 잃은 대상에 분노가 투사되면 상대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과 반대로 잃은 대상에게 나르시시즘이 투사되면 대상을 미화하거나 이상화하게 된다. 슬퍼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상실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의도이다.'

- 2장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


'월드컵 기간에 붉은 악마 물결을 보면서 우려의 마음을 표하는 외국인들 얘기를 몇 차례 전해 들은 일이 있다. 사적인 자리에서 염려를 표했던 이들이 일본인과 독일인이었던 점도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붉은 악마 물결을 파시즘이라 했다. ...(중략)... 2002년 월드컵 때 우리가 승리에 도취되어 그토록 자축의 잔치를 벌인 것은 나르시시즘이고, 그것이 과잉되어 표출된 것을 조증이고, 다른 의견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거세게 휘몰아치던 양상은 파시즘. ...(중략)... 독일 파시즘이 오랜 피해자 경험에서 비롯된 애도되지 못한 집단 무의식의 산물이라는 이론은 많은 학자들이 제시해왔다.'

- 3장 '저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내게 가진 좋은 못한 습관중 하나가, 와이프가 선호하는 책이나 영화는 거리낌없이 무시하는 버릇인데, 틀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달라서 등한시하게 되는 선입관으로부터 발생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같이 살아온 세월이 쌓이다보니, 너무나 다른 서로의 입맛을 알아간다고 해야되나. 서재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은 결국, 내가 읽은 책과 와이프만 읽은 책으로 철저히 나뉜다. 책 보는것을 둘다 좋아하건만, 정작 같이 읽는 책은 없으니, 독서삼매경의 아우라 안에서 우리 부부는 남남이나 다름없다. 제아무리 잡식성에다가 소모적인 독서를 즐기는 나에게도 샐러리같이 꺼려지는 책들이 있는데, 한국 신여성작가들의 우울한 사회적 탈피나 비련의 사랑이야기, 혹은 '30대에 해야할 000가지'류의 자기개발 서적들도 전혀 내 취향이 못되어 당췌 손이 가질 않는다.

얼마전 한국 서점에 들릴 일이 있어, 보통때처럼 필요한 책이 있을까 와이프한테 전화를 걸어본다.

"김형경의 신간 사다줘"

"제목이 뭔데..?"

"좋은 이별"

"..... 정말 너다운 제목이다. 진정 그보다 더 pathetic 할수가 없다."

책값 계산을 기다리며 습관처럼 첫 몇페이지를 들춰보았다. 어라 이게 아닌데, 책 제목은 훼이크였다. 눈물 질질 짜는 맬랑꼴리한 소설을 예상했던 내가 이번에는 제대로 틀렸음을 직감했다. 와이프가 고른 책을 나도 한번 봐야지 다짐한건 그때가 처음이다.

애절하기 그지없는 제목과는 사뭇 달리 이 책은, 다수에게 어필하는 이별의 아픔과 그 치유의 과정을 묘사하는 자칭 '심리 에세이'다. 체감상 각 개인의 무게감만 다를 뿐, 현대인들은 누구나 어느정도의 존재적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뿌리에 공통적으로 원죄같이 미해결된 상실의 상처가 남아있다고 전제하고, 아픔으로 성숙해지는 성장의 고통을 다소 낯설은 단어, '애도'라 이름 붙인다. 우울증 극복을 위해 작가 스스로 겪어야 했던 의학 심리 치료의 핵심에 '애도'가 있었고, 그 이유로 책 전개의 큰 틀이 프로이드와 융의 정신 분석적 이론들을 따르고 있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의 투자, 이별을 리비도의 회수라고 설명한다. 리비도란 원본능 영역의 열정 덩어리로서 사랑하는 마음, 성 에너지, 심리적 집중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의미쯤 된다. 리비도를 거두어오는 일은 그러나 빌려주었던 책을 돌려받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난 후에도 리비도는 관성의 법칙에 의해 한동안 상대방을 향해 흘러간다.'

- 1장 '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中



비단 연인들의 이별에 국한되지 않고, 작가는 인생살이의 모든 상실감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사실에 촛점을 맞춘다. 차근 차근 읽어가며, 도대체 그녀가 향하는 논지의 종착역이 어디일까 고민하면서 문득 초현실적인 신의 존재가 떠올랐는데, 역시나 심리 치료의 한계성과 종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마음의 성역이 거론된다. 그녀의 방대한 독서량을 가늠케하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고전들의 인용이나, 일류 작가다운 수려한 문체, 그리고 잡아내기 힘든 미묘한 심리상태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에 감탄하면서도, 지나치게 매마른 실존주의적 지성과 일부 성급했던 논리의 일반화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She tried too hard."

적절한 내 감상의 정리이다. 너무 결과론적으로만 치우치는 해석들로 억지스러운 부분들이 있어 점점 설득의 진의를 잃어갔다. 상실의 아픔을 득의하였다 독자들에게 길을 터주겠다는 이가, 그 내용과는 대비되어 정작 화자의 톤이 너무나 무겁고 어두웠다. 난해해서라기보다, 복잡한 생각이 쉬이 정리되지 않는 책 한권이었다. 한나절 단숨에 읽어치운 책을 일주일이 지나고서야 블로깅하는 이유도, 평소보다도 긴 후기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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