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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Books

三南에 내리는 눈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즐거운 편지' by 황동규, <어떤 개인 날> (1961)


새해 몇가지 다짐한 일 가운데 독서 52권이라는 다소 벅찬 목표를 세웠는데, 첫 단추를 잘 꿰겠다고 어렵사리 고민한 끝에 예전 아끼던 시집 한권을 오랜만에 펼쳐 보았다. 그때가 아마 내가 중학교 3학년쯤 되었을까. 처음 보는 시 한구절에 흠뻑 빠져 연습장에 외우듯 한없이 써내려 갔던 그 기억이 난다. 너무 좋아서, 혼자만 보고파서, 누구에게 알려주고 싶지도 않았던, 허나 사춘기 청소년들 너나 할것 없이 인기있던 시였다는 것은 나중에야 비로서 알게 되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詩의 세계에 눈뜨게 해준, 여하튼 나와는 소중한 인연이 닿는 셈이다.

시인들은 모두 천재이지 않나 싶다. 지금 읽어도 세련되기 그지없는 이 한편의 고전시가, 수 세대를 초월하며 근 반세기 지난 지금도 읽어내려가며 가슴뭉클해지는 이 서정시가, 실은 황동규 작가가 채 20살 되지 않던 젊은날에 써내려간 글귀라니 할말을 잃을 뿐이다. 오래 차분히 고심하고 절제함이 차서 넘치는 그런 깊이가 담겨있다. 수려한 미사어구로 억지로 뽐내지 않는 담백한 진정성이 배어있다.

부끄럽지만 한때 시에 빠져 살던 어리디어린 내가, 감히 시인이 되겠다 헛된 꿈을 꾸었던 시절이 있었다. 실은 그 시절이 너무 창피해서 대학 이후로는 시집을 보기도 모으기도 그만두었다. 지금도 창고 어딘가에 박스 가득히, 철없이 노트에 휘갈겨쓴 유치찬란한 내 wannabe
詩들이 몇백편 봉인되어 있을거다. 찾으려 마음 먹으면 못 찾을리 없겠건만, 어린날 내 부끄런 자화상을 차마 나 자신에게도 이제와서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이해하면 할수록 쓰기는 어려운 것이 詩 아닌가.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 - '미명'
<어떤 개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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