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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ctions

어머니의 필사(筆寫)












내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씨는 이미 중학교때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霧津紀行)>에 심취하여 그 책을 여러번 직접 필사했노라고 최근 어느 방송에서 밝혔다. 역시나 비범한 사람이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잠시만 한눈 팔면 또 다시 책과 멀어지려는 내 자신을 타이르며, 부끄러워해야 했다. 



또한 나는 예전부터 어머니께서 무슨 기도 제목이 있으시거나 말 못할 가슴 앓이를 하실테면 무작정 성경을 펴시고는 싸구려 낡은 공책에 한줄 두줄 말씀들을 옮겨 적으시는 일을 종종 목격해 왔었다. 무심했던 나는 그때는 그저 그러시려니 그 일을 크게 마음에 두지 못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러는 동안 봄이 여러번이나 오고 가을이 저물며, 낡은 공책들도 하나 둘 쌓여가 어느새 수십여권에 이르렀다 하셨다. 설마했던 일이, 결국 어머니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필사하시고 만다.



그 흐른 세월이 무려 15년이다.


어머니가 섬기시는 교회에서는 그 사실을 아시고는 정성스레 어머니의 필사본을 깨끗한 양장본으로 직접 의뢰해 제본까지 해주셨다 한다. 낡고 오래된 그 공책들은 신약 구약 두권씩 백과사전 크기의 두툼한 총 4권짜리로 차분하게 단장되었다. <친필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2013년 9월 16일 월요일 아침. 맞침.'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마치 긴 여름 방학 숙제를 이제 막 마친 사춘기 소녀처럼.


덤덤하게. 별 일 아니었다는 듯. 


하고픈 일이라 힘들지 않았다는 듯. 또 해보라면 할 수 있다는듯. 그 먼 인고의 세월을 그져 덤덤하게 '맞침'이라는 간단한 인사말로 떠나보내셨다. 그 덤덤함이 내 가슴을 두어번 세차게 울렸다.



그 안에 새겨진 어머니의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은 다 이루어 주셨을까. 이제 대대로 우리곁에 남겨질 이 유산은 여기에 미소만 머금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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