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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머니의 필사(筆寫) 내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씨는 이미 중학교때 김승옥의 단편 에 심취하여 그 책을 여러번 직접 필사했노라고 최근 어느 방송에서 밝혔다. 역시나 비범한 사람이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잠시만 한눈 팔면 또 다시 책과 멀어지려는 내 자신을 타이르며, 부끄러워해야 했다. 또한 나는 예전부터 어머니께서 무슨 기도 제목이 있으시거나 말 못할 가슴 앓이를 하실테면 무작정 성경을 펴시고는 싸구려 낡은 공책에 한줄 두줄 말씀들을 옮겨 적으시는 일을 종종 목격해 왔었다. 무심했던 나는 그때는 그저 그러시려니 그 일을 크게 마음에 두지 못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러는 동안 봄이 여러번이나 오고 가을이 저물며, 낡은 공책들도 하나 둘 쌓여가 어느새 수십여권에 이르렀다 하셨다. 설마했던 일이, 결국 어머니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 더보기
포토제닉 한국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그냥 대충 훓어만 보는데도 벌써 긴밤이 되었다. 주위에서도 이번에 어머님 얼굴이 참 좋아보이신다는 인사을 종종 받곤 했는데, 다시금 보니 표정들이 화사하신 것이 사진들을 무던히도 잘 받으셨다. 어떤날엔 여왕처럼 때로는 바닷사람처럼. 늘 어머니처럼 혹은 할머니처럼, 그러나 아내처럼. 막 50대처럼 또는 60대처럼, 간혹 40십대처럼. 여전히 여자처럼. 어머니에게 女子가 남아있다. 여행길이 고단하셨는지 돌아오셔서는 조금 편찮으시다. 그간 아들이 체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숨겨놓으신 젊음들을 감사하게도 카메라가 많이 담아 주었다. 사진들 직접 보시면 새 기운이 조금 나실테다. 더보기
밍크 평생에 사치란 걸 모르시던 양반이 한 여름에 무슨 바람이 나셨는지 갑자기 밍크코트 한벌을 꼭 하시겠다고, 조금 의아한 마음 접어두고 운전이나 해드릴 겸 시내에 있는 뷰티크로 향했다. 우리 어머니 그까짓 밍크 한벌 입으실 자격 충분하다고 그 오지랖 넓은 동물 애호가들과 싸워드릴 용의까지만 있었고, 화끈하게 큰 아들이 한벌 쏘겠다는 말은 매장에 닥지닥지 붙어있는 가격표들을 보고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괜히 따라왔다, 죄송한 마음을 숨겨야했다. "이런 날에 가야 많이 깎어." 넉넉잡고 한시간 남짓이면 당도할 곳인데 하필 평소에 도통 없던 심한 교통체증까지, 100도가 넘는 삼복 더위에 뭣하러 그 두터운 털옷을 장만하시겠다는건지 살짝 불평이 튀어나오려던 찰나, 금새 속내를 읽으신 어머니가 한마디 하신다.. 더보기
생신 축하드립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히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 고정희 시인 (1948 ~ 1991) 소시적에는 생신 때마다 돈이 없어 원하기를 바라는 선물들 다 드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머리가 커버리니 정작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늠치 못하고 차마 또 빈손이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