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에 사치란 걸 모르시던 양반이 한 여름에 무슨 바람이 나셨는지 갑자기 밍크코트 한벌을 꼭 하시겠다고, 조금 의아한 마음 접어두고 운전이나 해드릴 겸 시내에 있는 뷰티크로 향했다. 우리 어머니 그까짓 밍크 한벌 입으실 자격 충분하다고 그 오지랖 넓은 동물 애호가들과 싸워드릴 용의까지만 있었고, 화끈하게 큰 아들이 한벌 쏘겠다는 말은 매장에 닥지닥지 붙어있는 가격표들을 보고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괜히 따라왔다, 죄송한 마음을 숨겨야했다.
"이런 날에 가야 많이 깎어."
넉넉잡고 한시간 남짓이면 당도할 곳인데 하필 평소에 도통 없던 심한 교통체증까지, 100도가 넘는 삼복 더위에 뭣하러 그 두터운 털옷을 장만하시겠다는건지 살짝 불평이 튀어나오려던 찰나, 금새 속내를 읽으신 어머니가 한마디 하신다. 아마 '자가용 싸게 사려면 비오는 날 가라'의 밍크 버젼인가 보다. 있는 사람들이 더 하다는 말, 모르긴 해도 대충 틀린 말이 아니지 싶다. 무려 Bestbuy 에서까지 냉장고값을 기어이 깎으신 우리 어머니 에누리 신공이야 이미 주위에서는 전설로 불리고 있었던 터.
그나마 칡냉면 한그릇 점심으로 먼저 떼우고 매장에 도착한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명한 처사였다. 한시간이 넘도록 깎고 또 깎아도 성에 차지 않으시는지, 이미 매니저 얼굴은 홍역을 치른마냥 쩔쩔매는 기력이 역력한게 오히려 내가 대신 미안할 지경이었다. 손짓으로 어머니께 '그만 좀 깎으시죠' 아무리 싸인을 보내도, 이내 되돌아오는 싸인은 '넌 좀 조용히 하고 가만히 있어.' 하다못해 결국엔 제접 포스를 풍기는 여사장이 나타났다.
"어머, 뉴페이스 오셨구나."
이런 멘트는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건줄 알았는데, 웃음 참느라 조금 혼났다.
비풍초똥팔삼 화투 패를 깔듯, 보란듯 갖고 오신 현찰을 여사장 앞에 쭉 까시고는 배째라고 하신다. 둘째가 시월에 한국에서 결혼하는데 거기 가서 아들 가오 좀 세워줘야 된다고, 사실 밍크 입을 일도 없다고, 아니면 혹시 한달 정도 빌려줄 수는 없냐고 얼토당토않은 말씀까지. 초지일관 '싫으면 말고,' 혹은 '쫄리면 뒈지시던가.' 표정이시다. 애시당초 기세 싸움에서 어머니가 판정승이었다. 자기 앞에 깔린 현찰 보고 마다하는 장사치가 어디 있으랴. 에누리 없는 장사 없듯이, 안 남는 장사도 없다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머니도 곧 조금 지쳐가시는지, 여사장 관록의 말빨에 결국 조금 양보하시고 적당한 선에서 절충하셨다.
돌아오는 길 차안 뒷자석에서는 내내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전투적인 내공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고 있었다. 고부가 환하게 웃고 떠드는 것을 보자니,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금의환향하는 참모총장과 작전사령관의 모습이다. 그 와중에도 아까 매장에서 창피해서 표정 관리가 안되던 내 덕에 더 깎을 수 있었던 걸 못 깎았다며 운전병 장남에게 마구 삿대질을 하신다.
사랑하는 아들 결혼식에 폼 좀 내고 싶으셨던 마음, 그래도 단 한푼이라도 더 깎으시려는 마음, 두 마음 다, 콩나물 값 한번 깎아본 적 없이 고생 모르고 편히 자란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모든 어머니들의 자화상이다. 아까 식당 앞 길바닥에 떨어져 있던 1전짜리 동전을 무심히 지나쳤던 나는 함부러 평가하러 들면 안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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