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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ctions

그냥 걷기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t&no=9405


내게 좋은 습관이자 동시에 나쁜 습관이 하나 있는것이, 여기저기 인터넷에서 조금이라도 읽을만한 글을 지나치면, 그때는 시간이 없더라도 나중에 꼭 정독하자 즐겨찾기 해놓은 것들이 수백개가 넘는다는 것. 그러나 그때만 지나면, 현실은 전혀 '즐겨 찾지' 않는다는 것. 뭐 그런 아이러니다. 이 글 역시 원래는 오래전에 발견했던 글인데 요즘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며 큰 관심을 받고 있다길래 마음 먹고 오늘 정주행하였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23살 청년이, 꾸미지도 않은 어눌한 문체에,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나, 부담없이 편하게 읽어내려가기 시작한 글을 두시간 넘게 몰입하여 완독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전으로 한반도를 한바퀴 그냥 걸어보겠다는 당췌 야무진 꿈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게 과연 가능은 한가?


(중략)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강원도 인제를 지나 갈때의 일이다
그 날 나는 잠을 자기 위해 한 마을을 찾아갔다
마을 입구를 들어갈 때
마을 입구 근처에 있던 집 앞에 아저씨 한 분이 서 계셨고
나는 그분께 이장님댁의 위치를 여쭈어봤다

ㅍㅍ : 이장 집은 왜?
 
나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이장님 댁을 찾고 있다고 대답해드렸고

ㅍㅍ : 이장 집은 저~~~~~~~기 끝에 멀어
        그리고 이장 집 가봤자 잠 재워줄 데도 없어

나는 그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이 마을엔 잠을 잘 곳이 없으니 허튼 짓 말고 어서 나가라 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곧 말을 이어나가시길 

ㅍㅍ : 우리집에 남는 방이 하나 있는데 여기서 자고 가게
         괜히 쓸데없이 먼 데까지 가지말고
         가봤자 잘 데도 없어

라고 하셨다
;;
거기에 더해

ㅍㅍ : 우린 지금 읍내에 좀 다녀와야되니까 안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
집 안엔 사람이 없었다
뭐지?

ㅇㅇ : 저기.. 지금 저 혼자 두고 가신다는 거에요??? 혹시 불안하지 않으세요? 제 물건이라도 타고 가시는 트럭에 실어드릴까요??

ㅍㅍ : 허허..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야 어떻게 살겠나
       괜찮으니까 안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그렇게 아저씨 아주머니는 만난 지 5분도 안되는 내게 빈집을 맡기고 읍내로 나가버리셨다

;;;

 
정말 잘해주는 사람이 너무 많았음

내가 처음 말을 걸어보려고하는 순간부터 미소를 띠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내가 말을 거는 순간 내 자신도
아 이 사람은 왠지 나에게 잘해줄 것 같다....라는 생각을 들게끔 했다
그리고 또
미소는 아니라도
처음 내가 거는 말에
딱..표정이.. 정말 진지하게 잘 들어주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도 마찬가지로 다 잘해주셨다
나는 내 상황을 계획하고 내 표정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만들어 낸 것이지만
그분들에겐 전혀 예상치 못하다가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낯선 나를 처음부터 그렇게 친절히 대해줄 수 있는지
사람에게 너무 벽을 쌓고 사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그렇게 순수하게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후략)



석달 넘게 걸린 무전 전국일주. 온갓 물집과 갈라짐에 퉁퉁 부어오른 발을 붕대로 감아가며 참아낸 여정. 빈번하게 삼시세끼를 라면 뽀글이로 때우면서도 매번 맛있었다 적어온 일기며, 걷다가 해가 지면 돈 없고 잘 곳 없어 길거리에서 홀로 밤을 지새울때 느꼈을 무서움, 그러면서도 아직 곳곳에 남아있는 세상의 훈훈한 인정이며,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측은히 여기는 시골 어른들의 내리 사랑에 감동하고, 대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박해지는 인심과 사람들의 차가움을 목격하며, 그의 하루 하루가 마치 내가 그 옆에 동행하듯 혹은 안쓰러웠다가 다행스러웠다가, 세상 인심에 씁쓸해졌다가도 어느덧 또 따뜻한 눈물이 흐르다가.

좋은 글이란 그런게 아닌가 싶다. 굳이 꾸미려 하지 않더라도 그 풋풋함이 오히려 더 자연스런, 과장되지 않은 감동을 주고, 읽는 이들에게 각자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 모든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 여운이 울컥하며 오히려 벅차오르는 그런 글이었다. 내가 오만하여 평범하다 여겼던 이 젊은 청년, 실은 그 누구보다도 큰 가슴을 품은 비범한 위인이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라는 퀘퀘하고 진부한 말을 몸소 실행한 이 사람, 정작 본인은 별 뜻 없이 떠나기를 결정했고 정작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이 거의 없다라고 고백하지만, 난 그것이야말로 팔도 자연이 그에게 가르쳐준 인생의 겸허함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이들이 그의 담담한 여행기에 감동할 이유가 없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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