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부터 20대의 전부를 타지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던 나의 곁에는 큰 어른같은 분이 계셨는데, 그 분 내외는 오랫동안 나와 와이프를 참으로 많이 아껴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브레이크가 고장난 롤러코스터와 다름없던 내 젊은 날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보신, 아주 가까운 지인들도 차마 보지 못했던 나의 나약한 치부까지도 전부 알아버리신, 세상에 몇 안되는 분이다.
나에게서 나름 큰 비젼을 바라보시고는 물심양면으로 힘껏 도와주셨는데, 나는 끝내 그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했었다. 내가 너무 잘난 줄 알아서, 아직 철없이 너무 어린 줄도 모르고, 나는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미끌어져도 다치지 않고 잘 넘어지는 방법을 그때까지 터득하지 못했었다. 결국 크고 작은 실수들이 겹겹히 쌓이며 난 그만 한없이 긴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었다. 내가 더이상 제자리에서 일어날 의지를 보이지 앉자, 그분은 많이 지쳤던 나를 결국 놓아주셨다. 실망과 상심이 크셨는지, 나와의 인연을 다 정리하시겠다고 단언하셨었다.
그때 나는 고개를 숙인채, 아무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허나 모질게 말씀하시던 것과 달리 여리신 마음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쯤은 이내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 나와 그분은 참 오랜 세월동안 마음을 섞어왔던 사이였다. 애증(愛憎)의 관계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면 아마 그분과 나를 두고 빗대어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그분께서 전화를 주셨다. 예전 내가 은행에 몸담고 있을 당시 도와드렸던 일과 관련해서 몇가지 상담을 드리고서는, 이내 아직까지도 나에 대한 끈을 다 놓지 못하셨음을 은연중에 표하셨다. 내 아들 녀석이 그리 보고 싶으시단다. 지금은 손을 떼셨지만, 정계(政界)의 여러 인사들과도 오랫동안 줄이 닿던 양반이라 몸에 배신 그바닥 풍조 때문이신지, 늘상 그분의 표현은 그런 식이다.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처량한 존재들이다. 아들뻘 되는 이에게도 막상 하고 싶은 말씀을 다 못하시고, 기껏해야 돌려 말씀하는 것을 무슨 남자의 미덕쯤으로 평생 알아오셨으니.
그리고 나 역시 그런 구석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다만 남자들이란 생각처럼 강하지도 못할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여자들보다도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것쯤은 이제 알 나이가 되었다. 평생을 대쪽처럼 곧게 서 있어야 하는 것이 무슨 정의감처럼 포장된, 그래서 스스로를 묶는 무언의 압박들이 차츰차츰 자기 목을 조이는 것을 모르는 채 살다가, 정작 외로이 상처받고 남 몰래 앓을 뿐이다. 황량한 사막에 홀로 선 고목(古木)은 고된 세월 질긴 풍파를 막고 서 있지만, 고작 위태롭게 연명만 하고 있을 뿐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일이 어찌 흉이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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