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는 새해, 일출을 찍어보리라 하였건만 지난 밤 송년을 지샌 단촐했던 와인 몇잔이 좀 과했는지 눈이 뜨니 해는 이미 중천이다. 이 겨울, 추위를 버겁게도 참아내어 겨우 앙상하게 뼈만 남아버린 집앞 나뭇가지 사이에 첫 날 해가 수줍게 걸려 있다. 뭔가 특별하게 다른 해는 아니다. 어제 그제도 꼭 같았던 바로 그 님이다. 그러다가 어제도 그제도, 아니 너무 오랫동안 햇님을 당췌 본 기억이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어리석은 확신은 주저거릴 수 밖에. 그러니 신묘(辛卯)년 마지막 날엔 꼭 확인하리라. 그 같은 해가 매번 새해마다 뜨고 또 뜨는 것인지를.
벌써부터 제법 의젓하게 혼자서 조부모님께 새배를 올리는 녀석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빨라 자라버리는 것이 못내 씁쓸하다. 이제 몇 해가 겨우 지나면, 봉투안에 든 넉넉한 새뱃돈이 저가 좋아하는 장난감들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임을 깨달을 차례다. 몇해가 또 지나서면, 아마 할머니보다도 키가 커져버린 저가 오히려 당신을 업어드려야 할 날이 곧 올테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더 지나면, 할아버지가 왜 다른 사람들보다 젊잖고 말수가 적으신지, 왜 남모르는 눈물도 잦으신지 궁금증이 풀릴 일이다.
현대서예가이시자 세계적 명필(名筆)로 알려지신 하농(荷農) 김순욱 선생께서는 신묘원일(辛卯元日), 신년 휘호로 <日日是好日>(일일시호일)이라 하여, "매일 매일 좋은 날이어라" 기원하셨다.
쓸데없이 어깨에 힘이 들어갈 일은 없다. 누구에게 보일것도 없이 너무 과도하지 않게, 필요없이 너무 기운차지도 않게, 그저 잔잔하게 하루를 바라는 정제된 외침이다. 진정 기다리지 않는 이에게는 행운마저도 길을 비껴간다는 아주 오래된 덕담일 뿐이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귀하게 여기는 한 해가 되어야겠다. 무엇을 이루리라 다짐하기 전에,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는지 조용히 물어볼 일이다. 무엇을 얻으리라 소망하기 전에, 무엇까지 잃을 각오인지 차갑게 자문할 일이다. 어쩌면 하농 선생의 <日日是好日>이라 함은, 매일 좋은날이 온다기보다는, 그 어떤날도 어제보다는 조금 낫지 않으련가 하는 고되고 고된 희망 한가닥뿐이 아닐까.
이상하게도 새해 첫날, 달은 뜨지 않았다. 혹은 무슨 연유로 밤구름 뒤에 숨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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