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와이프가 사다 놓은, 이제 책장 먼지를 먹고 사는 '해변의 카프카', 마음은 간절한데 아직 보지 못했다. 그뿐이랴, 괴인 다치바나 다카시라던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유명 일본 작가들의 명작들을 수만번씩 제목만 들어볼 뿐, 정작 한권 제대로 읽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번역 서적들을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기피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에는, 문학 창작품의 완벽한 번역이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의 깨달음에 있다. 번역이라는 것이 그저 단어 하나하나 단순히 옮기는 작업이라면 어렵지 않겠다만은, 유연하지 못한 직역이던, 작가 원래의 뉴앙스를 훼손시키는 의역이던, 어떤 경우이던 번역서는 곧 태어나는 그 순간 전혀 다른 한권의 책으로 돌변하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그나마 플롯이 있는 소설류도 시원찮은데, 미묘한 함축의 결정체인 시를 번역된 버전으로 읽는다는 것은 좀 코메디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안 읽어보는 것보다는 나을듯 싶은데, 대부분 흠이라도 꼬집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오차이기는 하고, 내가 조금 오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맛있는 케익을 포크없이 대충 손가락으로 먹어보고 싶지가 않다. 제대로가 아니니 아예 안 먹겠다는 억지이자 고집이다. 참 어린아이스럽다.
그러나 남탓을 하자는것은 아니다. 그 모든것을 번역자 능력의 탓으로만 돌리기엔, 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의 스펙트럼, 그 광활함이 너무 크다. 실제로 두 언어간의 절대 해석이 불가능한 단어들이 수두룩하다. 사회성이 짙게 배어있는 비속어인 경우는 그래서 더더욱 제대로 알고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전 한국에서 일어난 어느 여대생의 '루저' 발언 해프닝은 어이없음을 넘어 내얼굴이 뜨거울 정도로 창피했던 국제적 망신이다. 당사자던, 당사자를 욕하는 사람들이던 아직까지도 정작 그 단어의 원래 뜻은 안중에도 없고, 엉뚱한 포인트만 뜨거운 감자가 되어있다. 모르면 쓰지를 말던가, 속된말로 뭐가 팔린다.
오래전 어느 외국인에게 우리나라 역사의 '한'을 설명하려다 결국 포기한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영어는 커녕 그냥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힘든 말이 아닌가. 말로 표현 못해도, 아는 사람들은 그냥 아는것, 그것이 그 언어가 가진 특수성이고 초월성이다. 멋모르고 인터넷에서 쿨한데 어쩌구 저쩌구 쿨한척 영어쓰는 젊은이들에게, 나는 정확히 'Cool'이라는 단어를 설명시킬 요량이 없었다. 그런데 백마디 표현보다 단번에 와닿는 사진 한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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